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주요작품은 <자화상>과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에>.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프랑스를 떠돌면서 책방 점원과 선교사 등을 지냈다. 1880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천직임을 깨닫고 습작에 열중했다. 네덜란드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후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개성적인 화풍이 확립되었다. 그는 현대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출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쥔데르트
사망: 1890년 7월 29일,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호우필 화랑에서 일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 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졌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정통교리의 접근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1881년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에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뇌넨에서 보냈으며,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풍경·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웨르펜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폴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테오는 호우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카미유 피사로와 조르주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1888년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 Portrait of Père Tanguy〉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Self-Portrait in Front of an Easel〉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1889년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지방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1891. 1. 25) 만성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인물화
닥터 가세의 초상 (1890. 6)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 (1890. 2)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1888. 8)
탕기 영감의 초상 (1877)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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