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수의 테크닉과 슈도이벤트(疑似的인 세계)
김관수. 그는 물질을 다루는데 있어 탁월한 장인적 기질의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개별적인 감성의 1차적 접촉 세계가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사회적 교섭을 통해 관객과 소통한다. 이러한 관객과의 만남은 그의 작업이 내포하는 또 다른 세계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작업실 밖의 김관수는 그 자신의 장인적인 질감의 세계의 있어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이제까지 생물학적인 현상으로서의 예술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사회적인 현상으로서의 예술에 눈뜨기 시작한다. 여기까지의 경과는 M. 뒤샹의 전철을 닮아 있다고 하겠다. 예술의 가치를 조건 지우는 것은 환경의 문제 이다. 이것은 좀 어렵게 말하면, R. 바르티드의 용어인 "미학적인 여러 형식과 사회적인 여러 형식사이의 상관관계" 를 뜻한다. 작업실 밖으로 나선 김관수의 "사회적인 여러 형식"은, 일찍이 M. 뒤샹의 관심사였던 '레디메이드'였다. 보통 '기성품(成品)'으로 번역되는 '레디 메이드'는 '주형화(鑄型化)된 인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예술사회학의 관례로 되어 있다. 먼저 막무가내의 '틀'을 만들고 거기 용해된 물질을 부어넣어 그것을 '주형'으로 삭힌 인식의 '틀'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레드 메이드' 는, 인식의 주체가 자신의 체험으로 확인된 질감, 커먼센스 또는 지혜를 세련시켜서 세계관을 넓혀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부정하는데서 또 다른 가치관을 차용借用)하는 것을 뜻한다. 기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회적으로 확립된 오소리티의 이론인 '레디 메이드의시스템을 채용(用)하는데서, 세상이 돌아가는 전체상(全體像)을 보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체상을 자칭하는 이미지가 각개 집단의 이해관계로 구속된 부분상(部分像)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예술가들의 예리한 통찰력이 이러한 사이비(似而非=슈도 이벤트)를 꿰뚫어본 것이었고, 이처럼 문명화된 환경을 벗어나려는 데서 고흐는 자신의 내부(內部)를 단숨에 밖으로 들쳐 낸 것이었고, 고갱은 때 묻지 않은 원시사회로 도피했던 것이었다. 한 세기의 일이며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는 이 '전체상의 해체(解體)가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증세의 병원은 우리들이 말하는 언어의 모든 뜻이 정치적(政治的)으로 오염되었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우리들이 말하는 '문화사'라는 말의 뜻은 기실 '정치사(史)'인데 불과하다고 마우드너 라는 문화사가가 말하고 있다. 전체주의를 상징했던 이데올로기가 와해되고 다시 '민족'을 단위로 하는 분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 우리들의 현재라고 하겠다. 우리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자유', '평화' 등인 여러 가지 상징은 거의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프라이비트 디피니션(私的인 規定)에 의한 은밀한 뜻을 남몰래 간직하기 시작했으며,
그저 전적으로 공허화(空虛化)된 언어상징의 공통성으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을 맺어주는 질서 감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며, 무한한 개인상황(個人狀況)으로의
분화(分化)가 일방적이고, 그 극한에 '사이비'의 이데올로기를 보완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이데올로기는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심볼의 강매(强)이기 때문에 구매저항(贍買抵抗)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심볼(상징)에 대한 데타치멘트(離脫)가 일반화한다는 것이다.
인용이 얼마간 길어졌으나 김관수를 설명하는 길목을 돌아왔다. 대체적으로 70년대 후반의 김관수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처럼 의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개인상황個人狀況)에 대해서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 하늘만을 우러러보았으며 몇몇 작가들과 따블라 라사'라는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따블라 라사'는 '백지환원(白紙還元)을 뜻하며, 아직 아무 것도 쓰지 않은 판때기(平面)를 가르키며, 정신의 백지상태로 비유된다.
이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 곧 문서(文書)가 내포(內包)하는 '뜻'을 긍정하고 부정하기 전에 그 기호 부터 부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육체 속에 의미(意味)를 내포하는 구조(構造)이기 때문에 그 원형(型=아키타이프)을 찾아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인 그 유구한 공간에서 자신의 의식을 떠 흐르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인 인식의 회로이며,여기서부터 김관수는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관념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뜻"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로부터 김관수는 땅을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감각적인 확실성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가 검색하려는 대상은, 인간의 역사를 보다 원대한 공간에서 유발시킨 생명의 생태학(生態學)으로 비유되는 기호(記號)들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실에 몰입하여,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미시세계(微視世界)의 생명원리를 추구하는 작업으로 비유된다고 하겠다.
여러 가지 이름 모를 자그마한 생명들의 유해(遺骸)와 잔해(殘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오브제를 찾아내기 위해 김관수는 들이나 숲-강가를 수없이 헤매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습득물(컬렉션)을 형태학(모호로지)의 관점에서 유별하여 하나의 구성으로 정리한 것이 그의 유명한 '블랙박스' 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는 '문서', '비문', '유적', '기념물' 등등인데
김관수는 이러한 '레디 메이드'로서의 '역사'의 가치를 보다 원초적으로 소급하는 '시간'의 형식을, 전시물로 구성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인간에게 그 고유한 생존이유를 처음 부여한 것은 인간자신이 아니었다는, 생명의 비외. 에조티리즘인 우리들의 잃어버린 과거에 관한 의식을 촉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사적인 사고(思考)란, 역사적인 유물 속에 잠겨있는 '뜻'을 해독하고 그것을 인간정신의 내용으로 용해하는 작업을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역사적인 유물이 언제 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제작되었는지는 그 현재(現)의 행위와 함께 살려는 데서, 현대의 퍼포먼스, 이벤트, 행위예술 등이 유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령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포리옹이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하여 이집트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한 경우로 비유하면, 김관수는 그러한 문자기호(文記)가 어떤 경로로 성립하게 되었는지, 기호이전의 이집트인의 의식의 유로(流)를 당시의 현지에서 함께 떠 흐르고 싶다는 입장이라고 하겠다.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그의 기호들이 출품되는데 거의 해독할 수 없는 기호들이다.
왜냐면 이 기호들은 앞에서 예시한 '프라이드베트 데피니션(私的規定)으로서의 은밀한
그리고 그만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인칭의 '시그널'인데 불과하다. 2인칭으로 소통되는 기호가 못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시각적으로 확인했던 그의 눈 뿐 이다.
대체 이 신호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2004. 11. 유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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