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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희 유작전 '영원히 닫힌 공간에서(The Day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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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희 유작전 '영원히 닫힌 공간에서(The Day Dreams) 

음울한 세계를 바라보는 강인한 시선 - 박건희의 사진 세계

글 박평종 (사진비평, 명지대학교 한국사진사연구소 연구원)

 

박건희는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 보다는 자기가 속해 있던 세계를 예민한 눈으로 관찰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의 눈은 늘 깨어있어 주변의 모든 것을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불필요한 다른 것을 깨끗하게 걸러내는 필터처럼 그의 눈은 잡다한 세계의 모습을 정제하여 그만의 세계를 남겨놓는다. 그렇게 걸러진 세계는 암울하고 칙칙한 잿빛의 세계이다. 변화무쌍한 세계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토록 꼼꼼하게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늘 그렇게 한결같은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오히려 그의 세계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세계를 음울한 시선으로 본다. 혹은 세계의 도처에서 음울함을 본다.
세계란 뭔가 잘못 짜여져 있어 암울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암울하다. 그래서 그 세계를 밝은 빛으로 물들이려고 하는 노력은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본성을 바꾸어버리려는 폭력이자 부도덕한 짓이다. 세계를 세계답게 하는 것은 원래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밝음만을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은 암울한 세계를 밝게 보려한다. 그러한 태도는 축복받은 의식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희극적이기까지 한 의식의 이러한 성향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건희는 시야가 가닿는 모든 공간을 어둠으로 물들여버린다. 어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추방하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 그의 사진은 어둠의 미학을 일궈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근원적으로 암울하다는 그의 시각이 보여주는 사진은 정작 그리 비극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비극과 절망이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꺾여버린 지점에서 나오지만 박건희는 애초부터 그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암울한 세계는 국지적이지 않고 통째로 그러하다. 어디를 가더라도 암울함은 그를 따라다니는 까닭에 아예 도피할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 결국 그는 암울한 세계를 편안히 받아들여 그것을 세계의 속성으로 간주한다. 편안한 수긍이 암울한 시각을 서정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그의 음울한 시각에는 우수가 깃들고 슬픔이 쌓인다.
박건희의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종종 그의 사진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결과론일 수도 있을 테고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사진에 나타나는 죽음의 상징들 때문일 수도 있겠다. 꺼져가는 불꽃, 잉태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달걀, 상복, 자신을 태워야만 빛을 발하는 초,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한 이물질들, 앙상한 손아귀 등이 그러한 이미지들이다.
그의 사진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아직까지는 없다. 완결을 보지 못한 탓인지, 지속되지 않아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음울한 세계관을 사진에 정직하게 투영시켜 보여준 그 세계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죽음이 그를 영예롭게 해서도 아니고, 사자(死者) 앞에서 숙연해지는 산 자들의 당위 때문도 아니다. 그가 일궈낸 세계는 곧 우리 자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는 세계를 바꾸거나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이로울지 모르나 세계에 대해서는 폭력인 까닭이다. 솜털의 충격까지도 감지해낼 만큼 예민했던 그의 감성이 그토록 거대한 폭력을 피해가려 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은 자신의 생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세계를 존중하려 했던 엄격한 윤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감각이 좋고 직관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맞는 말이다. 그의 감각과 직관은 앎의 교만과 밝음의 허영을 나무라는, 어눌하지만 지혜로운 지성이다. 그의 사진에 우리가 매혹당하는 까닭은 음울함의 한 복판에서 솟아올라오는 어둠의 총기를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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