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그는 당시에 크게 유행했고, 사진가라면 누구나 참가했던 공모전 또는 콘테스트 등에 한번도 사진을 출품한일이 없었을 만큼 자신의 사진에 자신 감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나 4번째 전람회를 끝으로 사진작업을 그 만두었다.
그는 말하기를"사진은 회화일 수 없었고 기계나 재료를 시험 검토해야하며 게다가 매일 촬영을 다녀야 함이 너무 바쁘고 벅차서 충분한 예술적 구상을 가질 시간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한다. 사진작업에 전 시간을 바칠수 없는 개인적인 상황이 그늘 짓눌렀을 것이다.
정해창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가식적으 로 사진을 계속하고 허명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정해창의 네번째 전람회가 끝난 직후인 1940년 대부터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어 사진재료가 거의 고갈 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사진작업을 중지한 이유의 하나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 했고(이때 그 학교에서 사진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양으로 사진예술을 강의했다고 한다.)6.25전쟁 후 덕성여대로 자리를 옮겨 동양미술사를 담당했었다. 1960년 우연히 다리를 다쳐 집안에 칩거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재(불상, 불화, 석등, 석탑, 사찰 등)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그가 집필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한국 석비의 양식'이 있다. 이처럼 정해창은 사진작업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나 꾸준히 한국적인 미를 탐구했다.
그는 사진외에도 서예나 조각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1941년과 51년 두차례에 걸쳐 서예 개인전람회를 열었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인(私印)도 조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학자적 기질과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가졌던 정해창은 한국사진의 큰 흔적을 남기고 1968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사진은 전쟁과 화재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현재 약 200여장의 유리원판이 남아서 우리에게 그의 사진계를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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