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무늬
가볍고 경쾌하게만 보이는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무늬는 그의 강박증세가 빚어낸 예술 상징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그란 점들 하나 하나에 쿠사마 자신의 자화상이 담겨있다고 했던 것처럼 그의 모든 예술적 모티프들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이었다. 지난 10월 서울 진화랑의 초대전으로 우리를 찾아왔던 쿠사마.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의욕을 보이는 그의 무한한 환상세계를 엿본다.
쿠사마 야요이는 완고한 집안에서 억압된 어린 시절을 지냈으며, 특히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은 평생 동안 치유되지 못하는 정신적 질환으로 남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 환각증상이 있었으나, 부모는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무조건 엄하게만 다스린 듯하다. 일찍부터 쿠사마에게 예술은 절실한 삶의 길이었고 치료요법이었다.
쿠사마는 1957년에 일본을 떠나 뉴욕에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했으며 1973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가장 왕성한 창작의 시기를 보냈다. 그 당시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앤디 워홀의 팝 아트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앨런 캐프로의 해프닝, 환경미술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산지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 때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간 것에 비해 쿠사마는 새로운 예술의 물결이 일고 있는 뉴욕이 예술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뉴욕으로 떠난다. 비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에 적을 두긴 했지만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았고, 작업장에서 작품제작에만 전념한다. 쿠사마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에바 헤세(Eva Hesse),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도널드 저드(Donald Judd) 등 뉴욕의 작가들과 바로 접하게 된다.
힘들게 지내는 가난한 작가인 스텔라를 비롯한 동료작가들은 이미 쿠사마가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고 특히 저드는 당시 작가로보다 평론가로서 활동했는데, 쿠사마의 작품을 처음으로 잡지에 소개했다. 쿠사마가 뉴욕 미술계에 알려지고 자리잡게 된 것도 그 당시 뉴욕의 미술흐름과 사조(시대정신, Zeitgeist)가 외부에 비친 그의 작업 현상과 잘 맞아떨어진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쿠사마는 초기부터 아쉴 고르키나 호안 미로를 상기시키는 초현실주의 분위기의 생물형태적 추상으로 시작하여 점차 그물 모양의 패턴이 화면 전체를 뒤덮은 〈무한망(Infinity Nets)〉 시리즈와 물방울(polka dots) 모노크롬 회화로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쿠사마의 그물망의 올 오버(all-over) 페인팅은 캔버스 경계를 넘어 오브제까지 확대되는 작업으로 전개되고, 이 작업은 오브제들과 회화를 함께 설치하면서 자연스럽게 설치미술·환경미술로 발전한다.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환상
쿠사마 야요이가 뉴욕에 있던 시기에 광고 상업 이미지를 이용, 대중문화에서 나온 팝 아트가 미술계에서 또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상생활 오브제를 매체로 쓰고 특히 작업 접근 방법으로 반복·집적(accumulation) 등의 구성을 자주 쓰므로, 얼핏 쿠사마의 작업을 팝 아트 맥락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시각적인 현상일 뿐, 근본적으로 작업의 기본개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
1963년 뉴욕의 거트루드 스타인 화랑(Gertrude Stein Gallery)에서 열린 〈집성물 : 천 대의 보트 쇼(Aggregation : one Thousand Boats Show)〉 전시는 쿠사마의 설치미술이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경우다. 전시장 중앙에는 남성 성기를 닮은 하얀 수백개의 돌기체로 채워진 노젓는 배를 놓고 흑백 포스터 크기의 사진으로 복사한 배 조각 작품 999점을 전시장 천장·벽·바닥에까지 모두 붙여 완벽한 설치미술을 소개한다.
쿠사마의 1963년 설치작업은 반복되는 소머리를 세리그라피로 뜬 것을 벽지로 이용해 설치작업을 한 1966년 앤디 워홀의 작업과 자주 비교되지만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차이점은 기계로 규격화하여 완벽하게 제작하는 워홀의 작품과는 상반되게 쿠사마는 손으로 제작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여겼다. 1968년 어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대량생산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가고 예술작품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 것으로 그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팝 아트와는 다른 작업임을 읽을 수 있다. 쿠사마의 설치미술이 선구적인 이유은 1960년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되돌아봐도 매우 앞서 갔음을 재확인할 수 있고, 이런 맥락에서 쿠사마의 미술사적 위치는 재조명돼야 한다고 본다.
쿠사마의 작업이 제로 그룹(Zero Group)과 연결된 것도 팝 아트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독일 레베르쿠센 미술관 관장이던 우도 쿨테르만(Udo Kultermann)으로부터 〈모노크롬 회화〉 그룹전에 초대받은 것을 계기로 유럽 미술계에도 소개되었다. 그 이후 하인츠 막(Heinz Mack), 오토 피에네(Otto Piene), 우에커(Ueker) 등 새로운 재료의 탐색과 빛과 움직임 등 구성 요소와 단색화에 관심을 둔 제로 그룹 창시 멤버들과도 함께 전시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바와 쿠사마의 작품세계에서 시각적으로 몇 가지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개념적으로 같이 묶기는 어렵다.
쿠사마는 거울·풍선·마카로니·헝겊·오브제 등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그의 반복·집적을 과장해 갔고, 작업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 이탈리아관 앞에 설치한 〈나르시스 정원〉 설치작업은, 전시에 정식으로 초대되지는 않은 쿠사마가 잔디 위에 1,500개의 거울 표면의 플라스틱 공을 설치, 판매하여 신문·잡지 등 매스미디어의 초점이되기도 했다.
그물망과 물방울로 세상을 덮는 쿠사마의 작업은 캔버스·오브제·환경·설치미술을 넘어 거리의 해프닝으로 연결되었다. 그 당시 미국은 사회적으로 베트남 반전운동, 성해방운동, 인권평등에 관한 수많은 시위와 운동이 심하게 벌어지던 때였는데, 뉴욕 센트럴파크, 자유의 여신상, 뉴욕증권거래소 앞에서 쿠사마가 고용한 배우들은 나체 시위를 벌이고 그는 물방울을 배우 몸 위에 찍는 퍼포먼스를 벌이다가 경찰에게 제지당하거나 해체되기도 했다. 그는 패션에도 관심을 보여 1968년에는 쿠사마 패션 회사를 설립, 뉴욕의 대형 백화점인 블루밍데일(Blo- omingdale)에서 ‘쿠사마 코너’도 열었다. 그의 활동범위는 비디오 작업에서부터 잡지 《쿠사마 오르지(Kusama Orgy)》를 출판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상과 같은 쿠사마의 폭넓은 활동은 자유를 옹호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일관성 있는 예술적 태도로 볼 수 있다.
1973년 쿠사마는 건강이 악화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도 작품활동은 계속하지만 많은 시간을 글쓰는 작업에 할애했다. 주로 자전적인 시·수필·소설 등이 미술계 작가들 사이에 중요하게 읽혀 신인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쿠사마는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거주하면서 병원 맞은편에 개인 작업실을 마련, 20대의 젊은 조수들과 작업을 하기도 했다.
쿠사마는 요즘 얘기하기를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쿠사마는 자신의 미학,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 등, 이와 연결하여 작업의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여 앞으로 200∼300년을 더 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한정된 시간을 느끼며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할 것이라고 한다.
1963년 뉴욕, 거트루드스타인 갤러리에서는 젋은 동양계 여성작가가 퍼포먼스를 치르고 있었다. 귀기 넘치는 삼백안을 부릅뜨고 갤러리 안을 배회하는 그의 모습은 신내린 무녀 같았다. 발기한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하얀 돌기 수백 개가 빽빽하게 들어찬 보트 한 대가 전시장 가운데에 놓였고, 보트의 외관은 9백99장의 흑백포스터로 복제돼 갤러리의 벽, 천장, 바닥을 완전히 도배했다. 단 하나의 원본과 스펙터클한 규모로 복제된 이미지가 교차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대량복제이미지의 도입에서 앤디 워홀을 앞선 시도
야요이 쿠사마(草間彌生, 75)의 퍼포먼스 ‘집합체-1천 대의 보트 쇼’는 앤디 워홀이 대량복제이미지를 도입한 것보다 앞선 시도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1957년 도미한 그는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회화, 조각,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은 물론 패션회사 설립, 잡지출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전방위예술가로 활동했고, 일본 귀국 후에는 지병인 정신질환을 치료하면서 시·소설을 출간하고 설치미술을 선보이는 등 현역작가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촘촘한 물방울무늬와 반복되는 그물무늬 등에서 유발되는 강렬한 시각적 자극 때문에 옵아트로 분류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내적 필연성에서 터져 나오는 이 반복적인 형태들을 옵아트의 편협한 범주에 넣어버리는 건 어쩐지 탐탁지 않다. 먼저 반복되는 형상 뒤에 숨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곰팡이처럼 조용하고 음산하게 퍼져나가는 물방울 이미지
강박증과 집착은 창작활동과 맞물려 때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되는데, 야요이 쿠사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 완고한 어머니와의 갈등관계에서 유발된 그의 강박증세는 미술이라는 치유제를 통해서만 안정을 찾았다. 쿠사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생물유기체적 형태와 강박적인 물방울무늬에 대한 집착은 그의 불안정한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덮어버릴 듯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원색의 물방울무늬 또는 그물망은 곰팡이가 증식하는 모습을 닮았다. 곰팡이가 소리 없이 음습한 바닥에, 벽에, 천장에 스며들어 검고 푸른 얼룩의 추상화를 만들어내듯, 쿠사마의 작품은 강박과 불안 속에서 싹튼다. 그가 즐겨 쓰는 기묘한 형태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규칙적이고 안정된 세계의 구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의 평면작업은 눈을 어질어질하게 할 만큼 명도대비와 착시효과를 강조하고 있어, 오래 보고 있으면 관람자는 현미경으로 본 세포 속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시각적 효과는 그림을 통해 지각되는 심리적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 반점들은 평면회화 위에서만 머물지 않고, 입체작업의 요철을 표현할 때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입체가 정면에서 빛을 받을 땐 볼록한 부분이 가장 밝게 보이지만, 쿠사마는 볼록한 부분에 흑색의 큰 점을 그리고, 높이가 낮아질수록 점점 작아지는 반점을 그려 마치 역광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역광조명이 주는 비일상적이고 기괴한 느낌이 생물유기체적 형태와 결합되면서 관람자에게 더욱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그의 물방울무늬는 설치작품 속에 그대로 이어지는데, 거대한 생물유기체적 형상 위에 얼룩처럼 새겨지는 물방울 ‘점 강박관념’(1996)을 비롯해 구슬 모양의 설치물 ‘나르시스 정원’(1966∼2002)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나타난다.
약력
야요이 쿠사마는 많은 관습에 의해 좌파적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본연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당시에는 논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금기의 영역을 남보다 앞서 잠식해 나갔다. 그녀의 작품들은 저마다 독특한 장르에 부합하며 동시에 그녀의 삶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기에, 우리는 그녀의 삶의 이야기와 작품의 형식이 만나는 곳에서 그녀만의 놀라운 자유주의자적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그녀의 당돌한 예술 세계와 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행동주의적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원류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새롭고 진지한 재평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환영
"그것은 환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쿠사마는 기술했다. 그녀 스스로 인정하듯이, 쿠사마는 열살 때 처음으로 환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식탁보의 빨간 꽃무늬 패턴을 보고 나서 천장이나 창 밖을 보면, 그 잔상이 망막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색의 파편들이 그녀를 둘러싼 가구와 자신을 온통 뒤덮어, 그녀는 마치 자신이 액세서리마냥 배경 속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POLKA DOTS
쿠사마가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하던 무렵, 그녀의 눈에 물방울 무늬가 나타나더니 곧 끝없는 망점이 되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물체에 찍힌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녀는 물방울 무늬에서 남성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태양과 여성적 생산의 원리를 상징하는 달의 형태를 보았다.
자유
한정된 현대미술사의 분류에 속하기를 부정하는 쿠사마의 예술행로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자전적, 혹은 자기발견의 과정으로, 더 넓게는 오히려 자신의 병보다 더한 고통과 욕망, 강박증에 시달리는 삶과 세상과의 투쟁으로 볼 수 있다. 70세가 넘은 그녀가 요즘 얘기하기를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쿠사마는 자신의 미학,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 등, 이와 연결하여 작업의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여 앞으로 200~300년을 더 살고 싶다고 한다.
29.jun.2003-7.Sept.2003 Yayoi Kusama Marugame Genichiro-Inokuma Museum
"Dots Obsession"Room (You too can experience "self obliteration".) 20.jul.2003-7.Sept.2003
5.may.2004
KUSAMA YAYOI KUSAMATRIX" KUSAMA YAYOI AVANT-GARDE FASHION SHOW"
Roppongi Hills (Mori Tower, Arena, Keyakizaka street),Tokyo, Japan
20.oct.2007 Anyang Public Art Project 2007
Produeced a new open-air sculpture "Hello, Anyang with Love." 2007 Pyeonghwa Park, Anyang, Korea
YAYOI KUSAMA INFINITY-NETS(TBBBTY), 2008
Acrylic on canvas 76 3/8 x 76 3/8 inches (194 x 194 cm)
YAYOI KUSAMA ENLIGHTENMENT MEANS LIVING A LIFE UNCONCERNEDLY, 2008
Acrylic on canvas 76 3/8 x 102 inches (194 x 259 cm)
YAYOI KUSAMA INFINITY-NETS (ABCETO), 2008
Acrylic on canvas 57 1/4 x 57 1/4 inches (145.4 x 145.4 cm)
YAYOI KUSAMA Pumpkin: medium, 2008
Fiberglass reinforced plastic 68 3/4 x 70 3/4 x 74 1/4 inches (175 x 180 x 190 cm)
YAYOI KUSAMA Aftermath of Obliteration of Eternity, 2009
Mixed media installation 163 1/2 x 163 1/2 x 113 1/4 inches (415 x 415 x 287.4 cm) Ed. of 3
YAYOI KUSAMA
GAGOSIAN GALLERY Installation view
http://www.yayoi-kusama.jp/
“무한한 환상의 세계”
김승덕: 이번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개인전은 특별히 구상한 여러 점의 설치·환경미술을 선보이는 것으로 안다. 종전에 열린 회고전과는 성격이 매우 다른데, 이번 전시를 하게 된 의도는 어떤 것인지?
쿠사마 야요이: 이런 성격의 전시회는 오랫동안 작가 생활을 하면서 항상 생각해 오던 것인데,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때’가 온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더 절실히 느끼는 것은 내 나이에 이르고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방향의 개인전을 열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김: 쿠사마 선생님은 추상회화에서 거리공연(Street Performance)까지 다양한 분야를 소개했고, 1960년대 초부터 설치미술·환경미술이라는 아이디어가 당신의 작품 속에 존재해 왔는데, 이 부분의 작업과 당신의 회화는 어떤 관계인가? 또, 설치미술·환경미술이 쿠사마 선생의 작업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쿠사마: 작품 제작에서는 물감으로 캔버스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이미지나 아이디어를 작업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1960년대 뉴욕은 미술사적으로 정점을 이룬 곳이기도 하고, 우연히 내가 작업한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혼돈스러운 상황을 내 나름대로 싸워 나갔고,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세계 많은 작가들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끼친 선구자라고 불리는 것으로 안다. 미술사가들은 나에게 팝 작가, 미니멀 작가, 제로 그룹의 멤버 등 여러 꼬리표를 달아 주지만 나는 어떤 이름을 내게 붙여주든 상관하지 않고, 외로운 작가의 삶을 살았다. 뉴욕에서 어느 날 캔버스 전체를 아무런 구성 없이 무한한 망과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 붓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이것은 아마도 환각이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내 손을 봤을 때, 빨간 점이 손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 손에서부터 점이 번지기 시작해서 나는 그 점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점들은 계속 번져 가면서 나의 손, 몸 등 모든 것을 무섭게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응급차가 와서 벨뷰병원에 실려 갔다. 의사가 진단하기를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정신이상과 심장수축 증상에 대한 진단이 나왔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나는 조각과 공연 작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내 작업의 방향 변화는 언제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김: 설치와 함께 공연이 뒤따랐고 대부분 현장에서 거리의 행인을 직면하는 선동이나 거리시위 상황을 배경으로 했는데, 정치적인 상황과 당신의 작품 세계는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
쿠사마 선생님이 있었던 뉴욕의 1960년대는 매우 활동적이고 문제 제시가 많은 시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성해방·평등권 운동·베트남 반전시위 등 이러한 배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당시 자신을 미술의 이슈를 다루는 정치적 활동가로 생각한 것인지? 혹은 단지 미술계의 입장에서 활동한 것이었는지?
쿠사마: 내가 뉴욕에 체류했던 시절, 가장 유명한 이벤트는 월 -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이스트 리버 다리 위에서 벌인 공연이었다. 젊은 남녀 나체 위에 형광 페인트로‘물방울 무늬(Polka dot)’를 칠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로 미국 성조기를 태운 것이다. 또 다른 이벤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조각상과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남녀의 나체 위에 오색의 물방울 무늬를 그린 해프닝이었다. 이 모두는 반전 선동 사건들이었다.
또 다른 반전 공연으로는 〈사랑의 찬가〉 〈영원한 사랑〉 등으로 월스트리트에서 잘 알려진 교회제단 앞에서 남녀가 나체로 벌인 공연이 있었다. 공연과 더불어 〈쿠사마의 자기 망각(Self-Obliteration)〉이라는 45mm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나의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 세상에서 외면 받은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영화는 우드 스톡에서 찍었고 조 존스의 음악과 슈나이더가 연기를 했다. 이 영화는 벨기에에서 열린 제4회 국제실험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이처럼 돌이켜보면 정치·미술 이슈에 함께 참여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물방울 무늬와 망을 나체에 그렸다. 이것은 삶을 찬미한다는 의미이고 또 아름다운 신체가 베트남 전쟁에서 부서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 예술가로서 ‘영원한 사랑’이란 주제 아래 반전·성해방·평등권 등 이 모든 것에 참여했다.
김: 1960년 레베르쿠센(Leverkusen)에서 열린 〈모노크롬 회화전〉, 1962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Nul전〉, 1964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그룹 제로(Group Gero)전〉, 1965년에 베니스에서 열린 〈제로 아방가르디아〉 등 많은 그룹 전시에 참여했는데, 제로 그룹작가들과 나눈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쿠사마: 우도 쿨테르만 교수가 처음으로 내 작품을 〈제로 전시〉에 소개했다. 그는 선구적인 정신의 철학자이고 레베르쿠센 미술관 관장이었을 당시 전세계로부터 모노크롬 화가를 초청, 모노크롬전을 기획했는데, 그 당시 〈무한망(Infinity Nets)〉 회화를 가지고 전시에 참여했다. 구성도 중심도 없이 내가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그린 망과 점의 축적이었다. 쿨테르만 교수는 내게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김: 일본으로 돌아간 1970년대는 글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거리를 두고 뉴욕의 삶을 회상하는 시간들이었던 같다. 언제부터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와 《맨해튼 자살 중독》이란 작품 이전에도 작품을 출판한 적이 있는지? 글쓰는 작업은 미술영역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쿠사마: 뉴욕에는 1957년에 도착했고 그 당시 매우 어려운 시간을 지냈다.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는데, 일본에 돌아와서 도쿄에 있는 정신병원에 살면서 지난 25년간 회화와 조각을 제작했다. 그리고 자서전적인 소설도 썼다.
그중에는 《크리스토퍼 거리의 매춘부 굴(The Hustler Grotto of Chri- stopher Street)》이나 《비인간화된 커튼 뒤에 갇힌 사람》 등을 들 수 있다. 전자의 소설은 신진 작가를 위한 명성 있는 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그러한 슬픔(Such Sorrows)》이라는 제목의 시모음집을 출판한 적도 있다. 내 글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반으로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나는 18세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시도 많이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해방되었고, 미국에서처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일본이 전쟁에 패배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미국생활에 비해 일본은 50년이나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회활동에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회화와 청동, 도자기 작업 등을 하고 있다.
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작업에서 거울방 설치작업이나 풍선 설치·환경작업이 다시 되돌아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성격의 작업이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을 알고 계신지? 요즘 참여한 비엔날레 전시 같은 곳에서 함께 참여한 젊은 작가들의 새 형태의 작업을 관심있게 본적이 있는지?
쿠사마: 내 예술의 찬미자들 중에는 놀랄 정도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많다. 내 작업이 만들어지는 작업장에는 모든 종류의 최신장치가 갖추어져 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계를 통해 내 예술에 관한 정보도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고 있다. 또한 해외 전시를 위해 지난 2년 동안 뉴욕·파리·타이완·서울 등 여덟 차례나 해외에 다녀왔다. 국외 전시를 위해 평균 한 달에 15억엔을 쓰는 셈이다. 최신 재료를 써서 새로운 조각을 만들기도 한다.
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대형 회고전을 치른 후, 이번에는 작가의 의도대로 기획된 전시라서 그 기쁨이 더하리라 생각된다. 자유와 열린 마음 이 두 단어가 쿠사마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되는데, 이 점에 동의하는지?
쿠사마: 감사한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그 동안 내 작품에 쓰였던 여러 테마를 열거하겠다.
‘물방울 무늬(Polka dots) : 내가 열 살 때 그 점들을 처음 보았고, 그 이후 계속 보게 되었다.’ ‘물방울 무늬는 나의 트레이드 마크다.’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환상’ ‘자아 망각’ ‘마카로니 바닥(음식 공포)’ ‘공기 할당량(공기 공포)’ ‘설치’ ‘영원한 사랑’ ‘섹스 강박관념’ ‘음식강박관념(죽을 때까지 수만 잔의 커피를 마셔야만 하는 공포)’ ‘가구 강박충동’ ‘반복 환상’ ‘무한 망’ ‘무한 점’ ‘무한 별’ ‘제한된 망’ ‘확산과 분열’ ‘자살 제식’ ‘부엌 세간(마카로니를 요리하기 위한 프라이 팬)’ ‘(마카로니로 가득한 후라이팬의 사진을 갖고 있다)’ ‘집성물 〈천대의 보트 쇼〉 배 한 대가 방 한가운에 놓여 있고 999장의 보트 포스터가 그 방의 천장·벽·바닥을 덮는다.’ ‘무한의 거울로 된 방(육각형 박스) : 오색 라이트를 대단히 빠른 스피드 사이클로 껐다 켰다 하여 이것을 보고 있는 관객은 잠시 후 중독된 듯한 느낌으로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름.’
지구성은 오직 하나의 물방울 무늬다. 십억 빛의 상징들은 이 전기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영원한 사랑’이란 주제의 작업은 내 개인전을 통해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번 발표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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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에서 출생했다. 1957년 도미하여 뉴욕에서 전위미술과 설치미술을 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물방울 무늬는 어렷을 적의 충격으로 인한 정신 강박 증세에서 기인한다. 쿠사마는 작품활동 이외에 자작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거나 패션 브랜드를 만들기도 하고 10여 편 이상의 소설과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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